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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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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급진전했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하고,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네덜란드 지배권을 모두 영국에게 위임했다(1795). 그러자 영국은 더욱 대담하게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여 페낭에 영국 상관을 설치하고, 말라카 및 바타비아를 접수했으며, 향료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영국은 페낭을 얻었고, 이 곳을 시작으로 해서 1819년에 싱가포르를 건설하기까지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해 갔다. 1824년에는 네덜란드와 맺은 조약(런던 협약)에 의해 수마트라, 자와(한국에 익히 알려진 자바(Java)는 영문명) 등 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영국이 관할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만들기에 이른다(1826). 하지만 이 때까지의 영국의 관심은 무역로 장악이었을 뿐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중국으로의 길' 이었다. 해로상의 거점을 장악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시까지는 말레이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자원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영국은 말레이 반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주석이 있었는데,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는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바로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말레이 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중간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점점 반목하게 된다. 당시 영국인들은 말레이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고,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편향적인 말레이계-중국계 고정관념은 동남아에선 아직도 통한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통한다. 영국인 지주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을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시켰고 중국계를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아직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통계 작성시에 '기타' 항목이 아닌 별도 항목으로 작성될 정도로 숫자가 많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인도계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고무 산업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말라야의 인도계 이민자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고무 농장은 주로 페락, 슬랑오르, 크다, 조호르, 느그리슴빌란 5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운로드: http://ebrochures.malaysia.travel/storage/myfile/files/Map/Tourist%20Map%20of%20Malaysia/TOURIST-MAP-OF-MALAYSIA-ENGLISH-3004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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