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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강원도 최대도시이며[5] 춘천시, 강릉시와 함께 강원도 3대 도시이다. 또 강원도 영서지방 서남부[6], 경기도 동부 일부(양평군 양동면/청운면)[7], 충청북도 북부[8]지역의 거점도시 역할도 하고 있다.

1995년에 강원도청 소재지인 춘천시의 인구를 앞질렀고 현재 인구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경상남도 양산시, 경상남도 진주시와 비슷하다. 2007년에는 21세기 이래 강원도의 기초자치단체들 중 처음으로 인구 3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2009년 국회의원 지역구 인구 상한선인 31만명을 돌파하여 2012년 2월 27일 선거구 분구가 확정되었다.[9] 현재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선거구가 단독으로 갑·을로 갈라지는 지역이다.[10]

2005년 원주기업도시와 강원원주혁신도시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원주시는 2010년 36만, 2015년 42만, 2020년 50만이라는 계획 인구를 설정했으나 2020년까지도 주민등록인구는 아직 35만 2천명에 그치고 있다.[11] 기업도시와 혁신도시가 예상보다 지지부진했던 영향도 크지만, 인구가 오르는 추세가 꾸준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그래도 이러나저러나 경제적, 지리적 입지가 탁월한 데다가 기업도시, 혁신도시, 평창동계올림픽의 호재로 말미암아 인구 증가율은 전국 수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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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난세이 제도 서/남부에 위치한 자치현으로 대만과 중국에 가까운 항공, 해상 교통의 요충지.

일본 본토와 다른 여러모로 독특한 지역이다. 일본과 깊은 교류를 하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일본의 영토로 된 건 200년이 되지 않았다. 류큐 왕국의 유산, 독특한 문화, 그리고 남국의 자연풍경 등 볼거리가 많아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한편 오키나와 전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며, 주일미군 기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오키나와의 중심지는 현청이 있는 나하시이다. 의외로 오키나와시가 아닌데, 오키나와시는 1974년 기존의 고자시와 미사토촌이 합병되어 만들어진 곳이다.[6] 명명 당시 나하시의 반발이 있었다고. 원래부터 류큐 왕국의 중심지는 슈리[7]였는데 일본에 병합된 뒤 나하시가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슈리 지역이 아예 나하시 일부로 흡수되었다.[8]

오키나와 구역은 본섬의 류큐 제도와 다이토 제도, 야에야마 제도, (센카쿠열도)로 나뉘며 나하시 현청에서 최남단의 모든 섬들을 총 관할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일본에서 태풍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지역으로, 1년 중 동아시아에서 발생해 북상하는 태풍의 절반 이상은 오키나와를 지나간다. 사실상 한국의 제주도와 비슷한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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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로 가려면 제주도 본섬을 거쳐서 가야 한다. 마라도로 가는 배는 운진항(모슬포남항)과 산이수동(송악산)에서 각각 운행하며, 운행 회사는 서로 다르다. 대중교통 접근은 운진항이 편하며, 제주시 시내에서 출발한다면 151번, 152번, 251, 252, 253, 254번 또는 255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터미널에서 모슬포항까지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전부 제주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며 제주국제공항에서는 151, 152번을 이용가능하다. 모슬포항에서 운진항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운진항에서 타는 경우는 '마라도가파도 정기여객선대합실'이라는 간판의 건물로 들어가면 되고, 산이수동에서 타는 경우는 '최남단 마라도 가는 여객선'이라고 쓰인 건물에서 표를 구매한다.

당일 예약은 안 된다고 하니 전화 혹은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 놓도록 하자. 예약이 되지 않고 남은 좌석은 예약 없이 온 손님들에게 현장판매되고 좌석이 꽤 많은 편이니 성수기가 아닌 이상 예약이 꽉 찰 일은 거의 없다. 배 운영사에 하루 전까지 전화로 예약하면 된다.

기상 이변 등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보통 30분 정도 소요된다. 매표는 출발 10분 전에 마감되므로, 미리 예약했더라도 승선신고서 작성 시간 등을 고려하여 최소 20~30분 정도 미리 도착하면 여유롭게 배를 탈 수 있다. 둘 중 어느 곳에서 승선하든 탑승 시 신분증이 필요하다.

마라도에서의 승하선은 북동쪽 부두에서 이루어진다. 마라도를 둘러보고 다시 나갈 때도 검표 등의 절차가 이루어지므로 가급적 출항 10분 전까지 도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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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서부[6]에 위치한 광역자치단체.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이 있어 대한민국 수도권의 관문도시이자 항구도시로 기능하며, 국내외 대부분의 항공사는 국제선 허브공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삼고 있다. 관내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있으며, 이를 담당하기 위해 산하 외청으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을 두고 있다.

면적은 약 1,063㎢으로 한국 최대 면적 광역시가 되었다.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인천직할시로 승격된 당시의 면적은 206.6㎢였다.(현재의 경기 고양시보다 조금 좁은 정도) 지속적인 간척으로 면적이 대거 늘어났으며 80~90년대를 전후해 현재의 검단과 계양구 북부 등 주변지역이 편입되고, 궁극적으로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 직전 정부의 직할시 광역화 정책에 따라 경기도 강화군, 옹진군을 편입하면서 오늘날의 인천광역시가 되었다. 원랜 울산광역시가 한국 최대 면적의 광역시였으나, 인천광역시에서 지속적인 간척 사업으로 2016년 역전했다. 그리고 2016년 KOSIS 국가통계포털 기준으로 서울특별시와 부산광역시에 이어 국내에서 3번째로 인구 300만 도시가 되었다. 이로서 한국 4대 도시(서울, 부산, 대구, 인천) 중 300만이 넘는 도시가 그렇지 않은 도시보다 많아졌다. 대구 뿐 [7]

수도권보다 인구가 적은 경상도가 3개의 광역시를 가진 것에 비해(부산, 대구, 울산) 수도권은 인천이 유일한 광역시다. 서울은 특별시고, 나머지는 전부 경기도에 속해있는 기초자치단체들이기 때문.

육지를 기준으로 북으로는 경기도 김포시, 동으로 서울특별시, 부천시, 남으로 시흥시, 안산시와 접하고 있다. 해수 권역이 국내 광역시 중 가장 넓다. 해상으로는 남쪽으로 충청남도 당진시, 서산시와 태안군[8], 서쪽으로 중국과 접하고 있으며, 북한과는 NLL을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 룡연군, 옹진군(황해남도), 강령군, 청단군, 연안군, 배천군 및 개성특별시와 맞닿아 있어 접경지역이 관할하에 있는 유일한 광역시이며, 자치군 2개를 보유한 유일한 광역시이다.

시목은 목백합, 시화는 장미, 시조는 두루미다.[9][10]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의 마스코트 유티가 두루미를 의인화한 것도 인천광역시의 시조가 두루미였기 때문이다.

서해에 접한 대규모 항만과 세계적인 국제공항, 인천경제자유구역, 개화시기 주요 개항장, 다도해 등 다양한 테마를 보여주는 도시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활발히 발전해왔고, 발전하고 있는 곳이다.

1985년 구월동에 시청[11] 이전을 기점으로 도심의 이전이 있었다.

인천을 한자로 仁(어질 인)과 川(내 천)으로 풀이하여,어진내로 순우리말화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인천이라는 지명이 인주(仁州)에서 조선 태종 시기에 격하당해 주(州)에서 점을 세 개 뺀 인천(仁川)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에 어진내를 대구광역시의 달구벌, 광주광역시의 빛고을처럼 사용하지는 않는다.[12] 차라리 인주를 순우리말로 번역해 '어진골'이라 하면 모를까...인천광역시를 순우리말로 이를 때에는 고구려 때의 지명이었던 미추홀을 훨씬 더 많이 쓴다. 단, 인천광역시 전역을 미추홀로 칭할 때도 있지만, 새로 명칭변경을 한 미추홀구(舊 남구)를 뜻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수도 인근에 위치한 항구도시라는 점에서 일본의 요코하마시, 중국의 톈진시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다만 요코하마는 카나가와현 산하의 시로 도(道)에 속한 기초자치단체와 비슷한 반면 인천은 별도의 광역 자치단체를 구성한다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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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다마 구릉(多摩丘陵) 임해부(臨海部)의 사주(砂洲)상에 자리한 한촌이었다, 1859년의 미·일(美日)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개항장(開港場)이 되면서 도시화의 기초가 성립되고, 1872년 도쿄와의 사이에 철도가 부설됨으로써 일본의 문호로서의 지위가 확립된 일본 최대의 항만이 있다.
한편, 1910년대 초와 1955년, 1959년 3차례에 걸쳐 실시된 연안수역의 매립공사(埋立工事)로 광대한 공장부지가 조성되자, 종래의 무역도시로서의 기능 외에 공업도시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최초의 시가지는 개항 후 항구에 접해서 개설된 상관(商館)·외인거류지(外人居留地)였는데, 현재 그 일대에는 현청·시청 등 관공서와 상사·은행 등이 집중되어 비즈니스센터를 형성하고 있다. 상점가는 그 배후의 이세자키초(伊勢佐木町)을 비롯한 모토마치(元町)·노게초(野毛町) 등지에 분포한다. 공업은 무역과 함께 요코하마의 산업경제의 중심이 되어 임해매축지(臨海埋築地)에 제철·조선·자동차·기계·식품 등의 대단위 공장이 입지하고, 내륙부의 공업지화도 현저하여 호도가야(保土ケ谷)·도즈카(戶塚)·오후나(大船) 등지에 많은 공장이 있다. 공업제품의 출하액은 수송용 기기·식품·전기기기·화학제품·석유제품의 순이고, 비단 스카프는 생산규모는 적으나 전통공업으로 유명하다. ‘메리켕 하토바(メリケン波止場:아메리카 부두라는 뜻)’라는 대부두를 비롯하여 신항(新港)부두·야마시타(山下) 부두 등을 중심으로 항만설비가 완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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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과 경상북도 성주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국립공원이다.

높이는 1,433m이다. 삼국시대 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서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렸고 가야의 산신제 때는 소를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접근성이 극히 불량했다. 말 그대로 오지. 하지만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옛 88 고속도로가 확장되어 광주대구고속도로가 된 지금은 접근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부산에서는 2시간 내외, 창원에서는 1시간 30분 내외, 대구에서는 30분이면 들머리로 가장 인기있는 백운동 주차장에 도달할 수 있다.
1.2.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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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기름 유출 사고가 있었다. 씨프린스호 기름 유출 사고로 불리는 것으로 태풍을 피해서 원해로 나가고 있던 대형 유조선이 소리도 해안에 좌초한 것. 당연하겠지만 당시 여수 주변의 어족 자원과 양식장들이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기름도 기름이거니와 그때는 유화제의 유독성에 대해서 확정되지도 않았을 때라 유화제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107] 이때 기름유출에 직격탄을 받은 섬지역 인구가 급감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 사고가 난 회사는 LG정유(현재는 GS칼텍스)였다. 그 당시도 700톤이라고 하던 기름 유출량은 5035톤으로 늘어났다.

1998년 12월, 북한군의 반잠수정이 여수시 돌산읍 임포 지역 앞바다에 침투했다. 국군은 이를 발견하고 침몰시켰다. 여수 반잠수정 전시관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99년 8월, 공립학교 교사, 사립학교 교사, 학원장 등이 카드 도박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2002년 여수에서 에이즈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어느 한 접대부가 윤락가에서 1년 6개월 간 관계를 맺다 6월 5일 경찰에 검거되었는데[108], 이 소식을 들은 여수 시민들의 에이즈 항체 검사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 다행히 대부분의 검사가 음성. 아무튼 했네, 했어

2014년 1월 31일 낙포동 GS칼텍스 원유2부두에서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로 일대가 큰 혼란을 빚었다. 주민들은 낙담하였으며 임명 때부터 여야 구분없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던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진보 보수 안 가리고 열불나게 할 정도로 한심한 사고대처를 보여주다 더 이상은 안되겠던지 박근혜 대통령이 2월 6일 해임시켰다.[109] 당시 유출된 기름은 최초 800L 에서 16만4000리터로 바뀌더니 다시 약 75만 리터로 추정된다고 기사가 났다. 한번도 아니고 벌써 2번째 기름 유출 사고다. 어업의 메카였던 여수가 현재 정부와 GS 칼텍스가 니탓 네탓 하면서 보상금 문제로 다투고 있다. 사실 가장 과실이 큰 가해자는 선장, 도선사 및 선사라 할 수 있으나 외국회사라 뒷짐 지고 피해복구나 보상에서 발빼려 하는데도 거의 비난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로 기름유출사고는 두번 다 여수에 있는 해상국립공원에 피해를 입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서쪽 끝자락이 여수 오동도-만성리 해수욕장인데 여기는 낙포동과 가깝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동쪽 끝자락은 여수 돌산-금오도-소리도인데 여기는 씨프린스호 기름 유출사고가 일어난 곳이다.

2017년 2월 24일에는 아기를 유기한 장소에서 사람의 뼛조각이 나와 충격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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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국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하였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보통은 죽임을 당했다. 귀족 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였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런 귀족 연정체제+선거군주제 체제의 나라는 응집력이 약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며, 나라가 쇠락하기 시작하면 갈기갈기 찢어지고 순식간에 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다시는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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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가 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나라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 혹은 내부의 대가 세력과 같은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 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 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여기저기에서 '부여'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아래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현대의 희미한 인상과는 달리 당대엔 의외로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호였던 듯하다. 혹은 마한, 진한, 변한과 같이 단일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일종의 원시국가들을 가리키는 집합체의 개념으로도 쓰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대개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선비가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과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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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수도이자 태국 제1의 도시로 최대도시이다.

싱가포르와 함께(양대산맥) 동남아시아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보통 이웃 나라들은 수도는 정작 볼 게 없으나 방콕은 그 자체가 이미 관광지다.(방콕이라는 한 도시의 여행이 왠만한 국가의 여행보다 임팩트가 크다고 볼수 있다.)

러시아워가 가장 끔찍한 도시 중 하나로 방콕 도시철도로 지하철 노선을 연결하고 있으나 지하철 노선이 잘 깔려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직 역부족이다. 진짜로 역부족이다. 아직까지 방콕 도시철도는 100% 완성된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이나타운이나 후알람퐁 역, 수완나품 공항, 근교로 인천광역시에 해당하는 톤부리 등 갈 곳은 다 간다.

한국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방콕 광역권[2]까지의 인구는 1450만 명의 대도시다.

방콕은 태국 내에서도 그 특수성이 강하고 왕가에 우호적인 부유층이나 중산층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방콕 시장은 왕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사람만 선출되고[3] 반 탁신파의 기세가 강하다.

태국은 일본과 유사하게 지역별로 나누어서 최저임금이 정해져 있는데, 일본의 도쿄도처럼 방콕이 태국 내에서 가장 높다.

또, 방콕은 다른 도시와 달리 방콕 내 어느 지역에서도 외국인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자타 공인의 국제도시이다.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 영어는 상당히 친숙하게 찾아 볼 수 있고, 방송에서도 아주 가끔 영어로만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날씨가 덥고 차와 사람이 많아 이런 요소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갈 곳이 못 된다. 그나마 건기에는 좀 나은 편이다.

방콕은 전세계에서 단일 도시 중 가장 많은 외국 관광객 방문자 수를 가진 도시인데, 1598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총 143억 달러를 썼다고 한다. 그 다음인 런던과 매우 근소한 차이 (0.2%)로 1위이다.

아시안 게임을 무려 4번이나 개최한 도시이다. 두 번은 떠넘겨 받았지만 1966 방콕 아시안 게임,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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