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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기도포천시 가볼만한 곳, 관광안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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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포천시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마홀군(馬忽郡)이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견성군(堅城郡)이 되었다. 고려 성종 때 포주군(抱州郡)이 되었다. 그러다 조선 태종 13년 때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칭의 끝글자를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하도록 지시해 포천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오늘에 이른다.[5]

한편 구 영평군(永平郡)은 고구려 때 양골현(梁骨縣)이라고 하다가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동음현(洞陰縣)이라 고쳤다. 고려 예종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다. 원종 때 영흥현(永興縣)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두었다. 조선 태조 때 영평현(永平縣)이 되었다.

1914년 영평군이 포천군에 흡수되었다. 남북 분단 이후 북부(옛 영평군의 대부분)가 38선 이북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면 경계의 조정이 있었다. 북측은 북반부를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년만에 철원군에 합치게 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남측이 수복하여 38선 이북의 포천군을 북포천군으로 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1954년 수복지구의 행정권이 회복되어 면 경계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1979년 포천면이 포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연천군 관인면을 편입하는 대신 삼정리, 갈월리, 금동리, 덕둔리를 제외한 청산면을 넘겨주었다. 해당 4개 리는 동시에 신북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 소흘면이 소흘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에는 포천군 전체가 도농복합시로 승격되면서 포천읍은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되었다. 특이한 점은, 현 포천시 동 지역(포천동, 선단동)에 해당되는 구 포천읍의 인구가 시 승격 기준인 5만 명이 되지 않았음에도 시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다.[6]

그 이유는 지방자치법 제7조 2항 3호의 내용인 인구 2만 이상의 도시 형태를 갖춘 2개 이상의 지역의 인구가 5만 이상인 군. 이 경우 군의 인구가 15만 이상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포천시는 구 포천읍의 인구가 5만 명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시 승격 당시 소흘읍 역시 상당한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총 인구가 15만 명 이상이었기 때문에(2003년 시 승격 당시 포천군 전체 150,240명, 포천읍 35,045명, 소흘읍 31,718명), 위의 요건을 충족하여 시로 승격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 포천읍 지역이 3만대에서 정체 중인데 소흘읍이 거의 5만이 다 되어 가 인구수가 역전되었으니 격세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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