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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옆동네 홍콩보다 300여 년이나 빠른 1542년(명나라 시대)에 포르투갈의 교역 기지인 포르투갈령 마카오가 되었으며 대 중국 수출입 거점이었다.
포르투갈이 중국에게서 마카오를 얻어낸 것을 "포르투갈인들이 해적을 퇴치한 공로로 명나라 황제가 마카오를 상으로 떼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건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창작한 이야기라고 한다.(...) 사실은 1553년에 포르투갈이 "배의 화물이 젖어서 잠깐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명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체류하게 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라고 한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 도교빠가정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전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의 환심을 샀다. 1557년부터는 매년 뇌물을 주어 거점 구축에 나섰고,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과 그 뒤를 이은 청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체류를 공식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연안에 왜구나 중국인 해적들이 들끓어서 골치를 앓았는데 이때의 마카오는 일개 작은 섬에 불과한지라 작은 섬 몇 개나 떼주고 귀찮은 일 없애자는 식으로 영구 임대안을 승인했고 그 이후부터 뇌물이 아닌 정식 임대료, 즉 명 조정에 대해 세금을 지불하고 대신 마카오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포르투갈에 주권이 이양된 건 아니었다.[9]
중국은 마카오 이후로는 수백년 간 서양인들에게 이런 창구를 추가로 더 내주려 하지 않았고, 마카오는 중국 대륙 내의 주요 무역거점으로 써먹을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탐을 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청교체기 와중에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침공해서 거의 함락할 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방교역에 있어서 마카오를 절대로 내줄 수 없는 것은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였는데, 네덜란드인들의 6분의 1밖에 안되는 포르투갈인들은 예수회 수도자들까지 전부 다 동원해서 맹렬히 저항했다.
수학에 능통했던 예수회 수도자들이 계산하고 지휘한(!) 포격이 네덜란드인들을 강타하면서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착각한 네덜란드인들은 도망간다. 지금도 이 전쟁 당시 포격했던 몬테 요새가 마카오의 관광지로 남아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영국, 스페인과 더불어 해양 제국으로서 맹위를 떨친 나라였다.[10]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자 마카오는 전성기를 맞았다. 양국의 직접적인 조공무역이 막힌 빈틈을 파고들어 마카오-나가사키 중개무역을 했고 큰 이득을 얻었다. 명나라와 만주의 청나라가 싸우기 시작하자 양쪽에 홍이포 등 무기를 팔아서 이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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