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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기도 시흥시 관광여행지도 / 추천 가볼만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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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시흥'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지금의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를 차지하던 옛 시흥군이라는 고을에 두고 있었다. 이들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잉벌노현, 통일신라시대에는 곡양현, 고려시대에는 금주현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금천현이 되었고 정조 때 시흥현으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시흥'이라는 타이틀만 단 오늘날 시흥시는 원래 인천광역시(미추홀→인천도호부), 안산시(장항구→안산군)였던 것이 에러. 왜냐하면 옛 시흥군의 중심지인 금천구 시흥동을 비롯한 원 시흥군 지역이 광명시 일대를 제외하고는 일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서울특별시 확장 정책에 따라 서울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시흥군 지역은 수도권의 팽창으로 각자 시로 분리되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이 원래 인천, 안산 땅이었던 오늘날 시흥시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흥시 북부는 인천도호부 전반면, 황등천면, 신현면→부천군 소래면이었다가 1973년에 시흥군으로 편입된 곳이고, 시흥시 남부는 원래는 안산군의 일부였다가 1914년에 시흥군에 편입된 곳이다. 시흥시 당국에서도 아예 대놓고 인천, 안산의 일부였다고 설명한다. 시흥문화원 측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시흥시에는 '시흥'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유래를 보면 이해가 더 빠른 것으로서 시에서는 2013년을 시흥 100년이라고 기념하는 입장인데, 위의 상황으로 볼 때 상당히 애매한 점이 많이 있다. 일단 '시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지만, 다른 시·구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시흥시 의회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금천에서 시흥으로 명칭이 바뀐 때(1795년)를 기점으로 한다면, 2013년이 시흥 218주년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현 시흥시 지역까지 '시흥'이라 불리게 된 것은 1914년 일본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 정책의 결과이기 때문에, 현 시흥시가 '시흥 100년' 운운하며 기념한다는 것은 결국 일제의 행정구역 재편을 긍정하고 좋다고 찬양하는 꼴이 된다.

또한 시흥시에서는 '늠내길'이라는 일종의 트래킹 길을 조성하였는데, 문제는 이 '늠내'라는 단어는 지금의 서울 서남부(영등포 권역)와 경기 광명시 일대를 가리키던 삼국시대 명칭인 '잉벌노', 즉 '진짜 시흥'의 이칭(異稱)이라는 점.[3] 미추홀(매소홀) 땅이었던 지금의 시흥시 북부지역에 남의 고을의 이름을 써먹는 것을 보면 아연실색할 만하다. 심지어 늠내, 잉벌노의 뜻인 '뻗어나가는 길'을 자기네 도시 캐치프레이즈로 내거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 때 시행된 부군면 통폐합의 폐해 중 하나이자, 광복 이후 수도권 도시화로 인해 역사성과 정체성이 완전히 꼬여 버린 지자체라고 볼 수 있다. 행정구역 변화가 가장 스펙터클했던 도시인 셈. 만약 시흥군 영역이 그대로였으면 인구가 "274만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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