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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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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나라에 수도가 있었던 시대를 가리켜 일본사에서 나라 시대라고 부르는데, 줄곧 헤이죠쿄에만 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740년에서 745년 사이에 쇼무 덴노(聖武天皇)가 구니노쿄(恭仁京)[4], 나니와노미야(難波京)[5], 시가라키노쿄(紫香楽宮)[6]로 옮겨다녔던 적이 있으며 이 시절들을 뭉뚱그려서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의 헤이죠쿄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수도인 후지와라쿄(藤原京)와 헤이죠쿄를 비교해보면 당풍 문화의 영향이 크게 두드러지는데,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로를 놓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궁이 수도 한복판에 위치했던 후지와라쿄와 달리 헤이죠쿄는 격자형 도로로 이루어진 도시 북쪽에 왕궁이 위치해 당의 장안성과 더욱 비슷한 구조가 되었다. 이는 후지와라쿄를 지을 당시에는 일본이 당에 사신을 보내지 않아서[7] 당의 수도 장안성이 어떤 구조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례(周禮) 고공기에 써진 고대 중국의 도시 구조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라서 지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간무 덴노가 교토로 천도한 뒤에는 국도로서의 기능을 잃었기는 하지만 그 뒤로도 야쿠시지(藥師寺) ·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 고후쿠지(興福寺) · 도다이지(東大寺) 등이 남아 문전도시로 번영하였다. 불교 도시로써 나라에는 여섯 개의 불교 종파가[8] 존재했고,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교토에 대칭되어 남도(南都)라 불렸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국교 노릇을 했으며[9] 한국의 호국불교 사상과 같은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이 존재했기에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로써 불교는 엄청난 위세와 권위를 누렸고[10] 이에 힘입어 불어난 장원과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소헤이들이 발호하게 된다. 특히 고후쿠지 승병들은 헤이안 시대 나라호시(奈良法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야마호우시(山法師)라 불린 히에이 산 엔랴쿠지 승병들과 함께 악명을 떨쳤다. 쇼무 덴노가 직접 발원해 지은 도다이지와 함께, 고후쿠지의 경우 후지와라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써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죠쿄로 옮길 때 같이 옮겨지은 것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도 연줄이 닿아 있어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겐페이 전쟁이 벌어진 12세기 말 전국에서 겐지 세력이 타이라노 키요모리 및 헤이케 정권에 반대하며 봉기하는 와중에 지쇼 4년(1181년) 음력 12월 나라의 승병들이 다시금 현지에서 겐지들의 거병을 도와 헤이케 정권에 도전하려다 다이라노 시게히라[11]에 의해 승병들의 거점이었던 동대사와 흥복사가 불타버린다.[12] 이 와중에 불길이 나라 전체로 번져서 시가지가 소실되었다. 일본사에서 말하는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난토 야키우치)이다. 다이라노 키요모리는 불타 잿더미가 된 나라의 사찰을 다시 짓지 못하게 했지만 국가를 수호한다는 불교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불교의 중심 사찰 대접을 받던 절들을 태워버린 것에 당연히 세간의 반발은 혹심했고[13] 키요모리가 3개월만에 병사한 뒤 헤이케를 이끌게 된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불교 세력을 달래기 위해 나라의 절들을 다시 짓는 것을 허용했지만, 헤이케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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