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부여 여행 관광가이드 지도 다운

반응형


PDF 개요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국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하였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보통은 죽임을 당했다. 귀족 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였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런 귀족 연정체제+선거군주제 체제의 나라는 응집력이 약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며, 나라가 쇠락하기 시작하면 갈기갈기 찢어지고 순식간에 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다시는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