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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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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옆동네 홍콩보다 300여 년이나 빠른 1542년[12]에 포르투갈 왕국의 교역 기지인 포르투갈령 마카오가 되었으며 대 중국 수출입 거점이었다.

당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스페인은 아메리카 신대륙, 포르투갈은 동양을 각각 나눠먹게 되자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에 적극 진출했고, 마카오에 오기 앞서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손쉽게 함락시켰으며 이후 중국으로 접근을 시도해 홍콩 신계 북부 튄문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 관군은 튄문에서 행패를 부리던 포르투갈 콘키스타도르들을 사로잡은 후 불랑기포, 조총 등 그들이 보유한 무기를 일제히 압수했고, 포르투갈인들은 조총 제조법이나 화포 제조법 등을 넘기고 많은 물자를 삥뜯긴 끝에 옆에 있는 주강 삼각주의 조그만 섬으로 옮겨갔는데 그게 현재 마카오 반도였다. 당시는 마카오 반도는 토사가 아직 퇴적되지 않아 섬이었다. 튄문은 마카오인들이 중심지 삼기에 부적절한게 늪지대와 갯벌뿐이었고 산이 많은 홍콩 지형 상 평지가 너무 적었으며 물을 구하기가 힘들었으므로 포르투갈인들은 튄문을 버리고 마카오로 이동했다.

포르투갈이 중국에게서 마카오를 얻어낸 것을 "포르투갈인들이 해적을 퇴치한 공로로 명나라 황제가 마카오를 상으로 떼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건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창작한 이야기다.(...) 사실은 1553년에 포르투갈의 콘키스타도르인 호르헤 알바레스 일행이 "배의 화물이 젖어서 잠깐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명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체류하게 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이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로 도교빠(...)라 불릴 정도로 신비주의에 탐닉한 가정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전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의 환심을 샀다. 한편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무단 점거한 것을 묵인해서라도 이곳을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를 위한 창구로 써먹을 생각도 있었다.

덕분에 1557년부터는 포르투갈 측에서 매년 뇌물을 주어 거점 구축에 나섰고,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과 그 뒤를 이은 만주족의 청나라 조정도 매년 500 냥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체류를 공식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연안에 왜구나 중국인 해적들이 들끓어서 골치를 앓았는데 이때의 마카오는 일개 작은 섬에 불과한지라 작은 섬 몇 개나 떼주고 귀찮은 일 없애자는 식으로 영구 임대안을 승인했고 그 이후부터 뇌물이 아닌 정식 임대료, 즉 명 조정에 대해 세금을 지불하고 대신 마카오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만해도 법적으로 포르투갈에 주권이 이양된 건 아니었다.[13]

중국은 마카오 이후로는 수백년 간 서양인들에게 이런 창구를 추가로 더 내주려 하지 않았고, 마카오는 중국 대륙 내의 주요 무역거점으로 써먹을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탐을 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청교체기 와중에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침공해서 거의 함락할 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방교역에 있어서 마카오를 절대로 내줄 수 없는 것은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였는데, 네덜란드인들의 6분의 1밖에 안되는 포르투갈인들은 예수회 수도자들까지 전부 다 동원해서 맹렬히 저항했다. 수학에 능통했던 예수회 수도자들이 계산하고 지휘한(!) 포격이 네덜란드인들을 강타하면서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착각한 네덜란드인들은 도망간다. 지금도 이 전쟁 당시 포격했던 몬테 요새가 마카오의 관광지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자 마카오는 전성기를 맞았다. 양국의 직접적인 조공무역이 막힌 빈틈을 파고들어 마카오-나가사키 중개무역을 했고 큰 이득을 얻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새로 일어난 여진족이 세운 만주의 청나라가 싸우기 시작하자 양쪽에 홍이포 등 무기를 팔아서 이득을 보았다.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타이완 섬의 정씨 왕국을 말려죽이기 위해 강력한 해금령을 내리자 마카오도 타격을 입을 뻔했지만 강희제의 신임을 받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덕분에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마카오의 위상은 갈수록 약해졌다. 1700년대 들어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되고, 증기선이 등장하자 배들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카오는 수심이 얕아 대항해시대 초반의 스페인의 갤리온 등 범선은 드나들 수 있었지만 근대 이후의 거대한 배들이 정박하기는 힘들었다.

포르투갈이 근대로 가면서 이웃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에게 휘둘리며 이류 열강으로 떨어지며 상업도 쇠퇴했다. 특히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펠리페 2세가 이베리아 동군연합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합병된 거나 다름없어져서 이때 결정타 크리를 맞아버렸다. 결정타는 옆에 영국령 홍콩이 세워진 것이었지만 그 전에도 마카오는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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