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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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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오키나와는 의외로 고려와 연결점이 있는데 원나라 침공 때 삼별초들이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차례차례 밀려나면서, 마지막 1273년 제주도 함락 당시 살아남은 마지막 몇몇이 류큐 섬에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2009년 2월 20일 한국중세사연구회 세미나에서 윤용혁 공주대 교수의 발표로는 실제로 류큐 왕궁 유적에서 고려의 귀면와나 연화 수막새 등이 출토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전통 문화나 오키나와 방언에서 한반도와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1609년 일본 에도 막부 때 사쓰마 번이 류큐를 침공해 일본 측에 유리한 몇가지 약정을 맺고 군을 물렸다. 일본 측 기록으로는 이 때 류큐를 사쓰마 번이 복속시키고 12만 석을 더 얻은 것으로 기록됐으나, 류큐 왕국 측 기록으로는 이를 기유왜란으로 명명하는 한편 독자성 자체는 유지된 걸로 되어있다. 어쨌든 이 때부터 류큐 왕국은 중국 조공 일변도에서 중일 양국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 것과 아마미 제도를 사쓰마 번 측에 양도한 것은 팩트다. 이런 이유로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에 더 가까워도 현재 행정구역상 가고시마 현이다.

1879년 일본이 류큐 왕국을 합병하면서 행정에 대해 고려한 끝에 류큐 현을 설치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당시 일본의 내각경(內務卿)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에게 1879년 3월 1일 제출한 제2차 류큐 처분에 관한 문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현대 표기가 아니라 당대의 문어 표기이니 양해 바란다). "琉球藩ヲ廢シ、更ニ琉球縣ヲ被置候、此旨布告候事但縣廳ハ首里ニ被置候事". 여기서 류큐 번(일본이 제1차 류큐 처분 때 류큐 왕국을 강제로 일본 내 행정구역으로 바꾸면서 사용한 명칭)을 폐지하고 류큐 현(琉球縣)을 설치하자는 내용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키나와 현으로 결정돼 오키나와라는 지명의 범위가 이전보다 확장되어 쓰이게 되었다.[4] 가장 유력한 추정은, 현재의 오키나와 현 일대가 류큐라고 불리게 된 것은 명나라가 류큐 왕을 책봉하면서 확립된 명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가 종주권을 고집할 것에 대비해, 류큐라는 이름 대신 현지 주민들이 스스로 불러온 지명인 오키나와를 행정구역 명으로 채택하되 오키나와가 가리키는 지역 범위를 확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변화 때문에 방언 단어의 뜻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어 단어인 우치나(うちなー)와 우치난추(うちなーんちゅ 또는 うちなんちゅ)는 원래 각각 오키나와 본도와 오키나와 본도 출신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키나와 현이 설치된 이후로 두 단어는 각각 오키나와 현 전체와 오키나와 현 출신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다. 쿠니가미어 단어인 후치나(フチナー)/후치난츄(フチナンチュー) 역시 마찬가지.

대개 지리적으로는 북, 중, 남부의 셋으로 나누며, 삼산시대의 세 왕국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둘로 나눈다면 중부와 남부를 합치고 이시카와 지협을 기준으로 남북으로만 나누기도 한다. 오키나와의 북부지역은 쿠니가미(国頭)[5] 또는 얀바루(山原)라고 부르며 오키나와에서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지형이 험해 인구는 적다. 이시카와 지협 이남의 중부지역은 나카가미(中頭), 남부지역은 시마지리(島尻)라고 하며 섬 인구의 상당수가 모여살고 있다.

일제 패망 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통치를 수십년간 받았으며, 이 영향으로 현재도 가데나(제18항공단), 후텐마(36해병비행단) 등 많은 수의 주일미군이 오키나와섬 각지에 배치되어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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