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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라남도 나주 여행관광 가이드, 가볼만한 곳 추천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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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54개국 중 불미국(不彌國)이었다고 추정된다. 현 반남면에는 그 규모와 숫자로 따지면 경주의 왕릉들과 맞먹는 대형 고분군이 있는데, 불미국의 세력은 그 일대에서 꽤 강대했던 걸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마한이 백제에게 정복당하며 불미국이 있던 지역은 발라군(發羅郡)이 되었다. 백제 멸망 후에 당나라에서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며 대방주(帶方州)가 된다.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가 웅진도독부를 몰아낸 후 전국을 9주로 편제하고 발라군을 발라주(發羅州)로 승격시켜 오늘날의 전남지방을 관할하는 치소로 삼았으나 발라주는 9년 만에 다시 발라군으로 강등되고 무진군(武珍郡, 현 광주광역시)을 무진주(武珍州)로 승격시켜 무진주 중심의 지방편제로 개편하고 현 나주시 반남면 지역은 반남군(潘南郡)으로 승격시켰다. 이와 함께 신라의 지방 군사 조직인 10정 가운데 미다부리정을 현 나주시 남평읍 지역인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에 설치하여 무진주 관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토착세력을 통제하게 한다. 686년(신라 신문왕 6년) 통의군(通義郡)으로 개칭되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금성군(錦城郡) 혹은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된다.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역이었으나 903년(태봉 궁예 3년/후백제 견훤 12년/신라 효공왕 7년) 궁예는 왕건을 파견해 금성군을 후백제에게서 점령하고 나주(羅州)라 개칭한다. 그 후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으로서 견훤의 세력권이었던 것처럼 나주는 왕건의 주요 거점이 된다.

고려시대에는 나주는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혜종의 출생지이기도 하였으므로, 왕실의 어향(御鄕)이라 불리게 된다. 983년(고려 성종 2년) 십이목(十二牧)이 설치될 때 나주에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된다. 여요전쟁 때는 현종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1018년(현종 9년), 현종은 자신이 위기일 때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나주(羅州)와 전주(全州)의 첫 글자를 따 전라도(全羅道)를 만드는데 광역도의 시작이다. 다른 광역도들은 300여 년이 지난 후에 생긴다. 이렇게 5도 양계 제도가 실시되면서 전라도 나주목이 되었으며, 전주목과 함께 도의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큰 도시였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이었던 이연년 형제의 난이 김경손에 의해 나주에서 진압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나주목이었으며,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당시만 해도 이웃 광주는 나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이 점령하지 못한 도시가 나주였다. 그 정도로 양반의 세가 강했던 곳이었으며, 자연히 전라도 남부의 행정 중심지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23부제로 개편할 시 나주부가 있었을 만큼 전남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고려-조선 때 이렇게 나주가 번성했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 지리적 입지 때문이었다. 곡창 지대인 전라도 내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농업 생산력을 자랑하는 나주 평야의 중심지였고, 여기에 서남해안의 해운 및 영산강 수운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나주는 전라도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던 것.

그러나 1896년 전라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고 전라남도의 도청을 광주에 두면서 나주의 쇠퇴가 시작된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을미개혁이 시작되었고 단발령, 23부제가 순서대로 시행되었다. 양반의 세가 강했던 동네였던 만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들이 봉기하면서 나주군수가 죽는 일이 발생하였고 나주부 관찰사였던 윤웅렬(윤치호의 아버지)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광주로 처소를 옮겼다. 곧 윤웅렬은 나주의병들을 진압하였지만 광주에 이미 우주방어를 시전해놓았기에 진압 후에도 나주로 돌아가지 않고 조정에 상주해 광주에 처소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 후 23부제가 13도로 바뀔 때에 광주에 자연스레 도청이 생긴 것이다. 윤웅렬이 잘못했네 광주가 빠른 속도로 나주의 세력을 흡수하면서 급성장하는 동안 나주는 큰 발전을 하지 못했다. 만약 구한말에 윤웅렬이 나주로 돌아간 뒤 처소를 두고 일제 시대와 해방 이후에 도청이 생긴 뒤 60~70년대 개발 버프까지 받았다면, 나주광역시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나주의 광역시화까지는 무리였다쳐도, 광주와 함께 지금의 목포시는 가볍게 누르는 수준의 인구 수를 자랑했을 것이다.[4]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남평군 및 함평군 동부가 나주군에 편입되었으며, 동시에 영암군으로 일부 면[5]이 이관되었다. 광주의 서쪽에 있는 광산군 송정읍이 성장하면서 1949년에는 광산군(현 광산구)에 3개의 면[6]이 또 이관되어 군역이 축소되었다. 1931년에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승격되었고, 1937년에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81년에야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겨우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될 수 있었다. 이는 전남, 전북을 통틀어 32년만의 시 승격[7]이었다. 읍 승격은 순천시와 동일할 정도로 빠른 편이었으나 시승격은 그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나마 비료 공장(현 LG화학 나주공장)이 하나 있어서 지역의 산업 기반이 되었는데, 이게 없었으면 시 승격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8] 1986년 금성시는 나주시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95년 나주군과 통합하며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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