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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라남도 관양 여행관광가이드북 (광양시청 제공하는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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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개요


지역의 이름은 옛날부터 계속해서 바뀌긴 했으나, 현재와 같은 경계는 대략 삼국시대부터 비슷하게 획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광양 지역은 예로부터 마로(馬老)[3], 모루(牟婁), 물혜(勿慧) 등으로 불렸었는데 이들 모두 토종 지명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것들이다. 이렇게 불리게 된 것에는 2가지 설이 있는데 꼭대기를 의미하는 마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말(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광양에 말(馬)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 동안 광양은 원삼국시대 때 마한의 영역있을 것이라고 간주해왔으나 광양과 그 주변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가야 계통의 유물들과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변한의 영역 혹은 마한과 변한의 완충 지대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어 삽평군(歃平郡)[4] 관하(管下) 마로현(馬老縣)이라고 불렸었다. 그러다가 5세기에 백제가 약화된 틈을 타 대가야가 전라도 동부 섬진강 유역에 진출하게 되면서 광양은 모루(牟婁), 물혜(勿慧)로 불렸었다. 그러나 백제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면서 광양은 또 다시 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해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남북국시대였던 경덕왕 16년(757년)에 승평군(昇平郡)[5] 관할 희양현(晞陽縣)으로 개칭되었었다.

이후 후백제가 세워지면서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었다가 고려가 건국되면서 광양현(光陽縣)으로 개명되어 이때부터 광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승주(昇州)[6]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그러다가 12세기 무렵에 처음으로 중앙 정부에서 광양에 감무(監務)를 파견하면서 순천에서 분리되었다. 성종 14년(995년)에 전국을 10도로 나누게 되면서 광양은 해양도(海陽道)[7]에 속하게 되었었다. 이후 현종 재위 시절에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게 되면서 광양은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광양읍성이 함락되고 광양 지역이 폐허가 되면서 복구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순천도호부에 편입되기도 했다. 고종 32년(1895년)에 23부제를 시행하게 되면서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으나 1년 3개월 만에 23부제가 폐지되었고 전국이 13개의 도(道)로 나뉘게 되면서 광양은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5년에 다압면 섬진리 두치진(豆恥津)[8]을 하동군에 넘겨주었다. 1949년에 광양면이 광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에 동광양 지역을 관할하는 광양지구출장소가 설립되었었다. 이후 1989년에 동광양시로 분리되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동광양시와 기존의 광양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시 형태의 광양시가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후 1998년 광양시 동간 행정동 통폐합으로 인해 5개의 행정동밖에 남지 않아 비슷한 인구대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행정동의 수가 적은 편이다. 이는 광양시의 인구 증가로 인해 다시 문제가 되는데, 광양시의 중심인 중마동의 경우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로 행정자치부 지침상 분동기준인 5만명을 넘었으나 분동 (중마1동, 중마2동...)을 하지 않고 있어 전라남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행정동이다. (참고로 인구 4만3천인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동은 점촌5동까지 분동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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